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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총수, 이건희 회장 별세?! 그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요?

식꿈 2020. 10. 25. 21:24

안녕하세요. 트렌드를 모아보는 식꿈이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실시간 검색어 트렌드로 인사드려요.

1025, 모두가 주목하는 실시간 검색어 키워드는!? 바로 이건희 회장 별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삼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죠.

이건희 회장의 삶 속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해요.

1942년 출생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장자 중심의 사고가 강했던 과거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러 혁신적인 행보를 통해 이맹희, 이창희 두 형을 넘어

삼성그룹의 실제적인 후계자로 우뚝 선 인물이지요.

 

대구, 일본, 부산을 지나며 격동의 시기 유년시절을 보낸 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자퇴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졸업장을 받게 됩니다.

이 시기 자동차를 중고로 구입하여 수리하는 과정을 거치며 쏠쏠한 이윤을 얻기도 했다고 하네요. 유학생활을 마치고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60년대였다고 해요.

동양방송, 중앙일보 등을 거쳐 삼성물산 부회장직을 맡게 되며

본격적으로 삼성그룹 내에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하였고

그가 삼성그룹 회장이 되기까지는 대략 20여년 정도가 걸렸다고 하네요.



20여년의 세월 중 삼성그룹 왕자의 난이 발발합니다.

바로 후계자 권력 구도를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등이

아버지 이병철과 지분을 둘러싼 갈등을 빚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청와대에 고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던 만큼

당시 삼성을 둘러싼 부자지간의 갈등 수준을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언론통폐합 전까지 동양방송을 자신의 주요 사업으로 삼고,

드라마 등 다양한 언론 매체 부분에서의 성장을 이끌어내며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도 했다고 하죠. 특히, 국 반도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삼성그룹 내부의 반대가 심했으나

자신의 사재를 쏟아 이를 이뤄냈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삼성전자의 주요 먹거리를 이 당시 이뤄내기도 한 것이죠.


1988은 삼성그룹의 창업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 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제 2의 창업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을 제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며

삼성이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상황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영혁신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던 1993,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혁신 선언은 아직도 이건희 회장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남아있는데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말은

지금도 여러 기업 경영자들에게 건강한 자극을 주었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201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식물인간에 가까운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계속 받아왔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20201025, 78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병철 회장과 같이 에버랜드 부지에 속한 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요.

이러한 이건희 회장의 삶에 있어서도 삼성을 명실상부한 국제 기업으로 키워내고,

엄청난 규모의 계열사를 바탕으로 한 삼성그룹이 공룡그룹으로 성장하는 등

그의 경영자적 행보에 대해서는 범인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등에서 드러났듯이 이건희 회장이 이끌었던 시기,

삼성의 여러 문제점도 있었다고 하죠.

특히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주목받았던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사망사건(백혈병 논란),

무노조 방침 이행을 위한 감사팀·인사팀의 행보를 둘러싼 각종 논란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업화의 상징,

삼성그룹 그리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조금 더 세월이 지나야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편안한 일요일 저녁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