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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검색어에 1987이 있는 이유? 영화 1987로 알아보는 그 날의 역사!

식꿈 2020. 10. 29. 23:13

안녕하세요. 트렌드를 모아보는 식꿈이입니다.

전국 곳곳에 한파가 시작된 오늘 저녁,

갑작스레 실시간 검색어에 1987이라는 단어가 올라왔죠?

바로 OCN에서 오랜만에 영화 1987을 방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알렸던

1987년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발생

군부 독재 시절동안 계속되었던 공안조작 사건은 1987년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 열사

서울 용산구에 소재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상태에서

경찰들에 의해 물고문을 당하게 되죠.

선배의 소재를 묻는 질문과 계속되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열사는 아는 것이 없다며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두 다리를 들어올린 물고문까지 자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욕조 턱에 박종철 열사의 목이 눌리게 되었고 끝내 질식하게 되죠.

사건을 은폐하려는 당시 경찰들에 의해 이 사건은 소문없이 사라지는 듯 하였으나,

일부 기자들의 취재에 의해 바깥으로 소식이 새어나오게 되었고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어 책상을 탁하고 치니, 학생이 억하고 죽었다!”

라는 엉터리 발표를 하게 됩니다.



2.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세상 밖으로 점차 새어나가며

사람들에게 알려질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전두환 정부는 그간 계속되었던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갈망을 꺾고

신군부의 권력 연장을 위해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인사들의 계속된 노력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절정에 달했으나

전두환은 413,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여

기존의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죠.

·야의 입장 대립이 극명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헌법을 수정하기는 어렵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곧 열릴 예정이니

올림픽 이후로 개헌 논의를 미루자고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결국은 간접 선거를 통해 차기 대권을 선출하겠다는 의지였고,

당시 여당 총수였던 전두환의 오랜 친구, 노태우가 유력한 권력 후계자였습니다.



3.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치사 사건 관련 진실 폭로

언론사를 중심으로 박종철 열사의 사망 원인에 대한 취재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해직 기자 이부영

박종철 열사와 관련한 사건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고문치사 사건에 참여했던 고문경찰들이

입막음의 차원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것인데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게된 것에 대한 분노와 반발로

교도소 내에서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이부영은

교도관과 교도소 보안계장을 통해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게 됩니다.

영화 1987에서는 잡지 썬데이 서울을 활용해 세상에 알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휴지를 활용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이부영씨의 메모를 전달받아

19875, 5.18 광주 민주화 항쟁 7주기 추도 강론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된 사건임을 폭로하게 됩니다.

 

4.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 발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으로 나온 후,

전국 주요 대학의 대학생들은 이를 민주화 운동의 새로운 열기로 연계하고자 하였고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자 했습니다.

진압을 위해 나타난 경찰들은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야할 진압용 최루탄을

직사로 발사하게 되었으며 안타깝게도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에 후두부를 맞아 쓰러지게 됩니다.

이한열 열사는 세브란스병원으로 긴급히 이송되었으나

민주 항쟁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75일에 사망하게 됩니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은 음지에서 몰래 새어나온 안타까운 소식이었던 반면,

이한열 열사의 사망은

 백주대낮에 발생한 군사 정부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5. 전국적 규모의 항쟁 발생

1987610일을 기점으로 학생, 직장인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차량 경적 소리를 들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되며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던 광주, 박종철 열사의 고향이었던 부산 등으로

시위는 확산됩니다.

이윽고 대전, 진주, 마산, 춘천, 충주, 청주 심지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확산되었습니다.

6월 중순까지 전국적인 시위는 계속되었고

정부는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폭력적 진압의 방식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최루탄은 부족했고 경찰들의 체력과 사기도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죠.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광주를 진압했던 것처럼

전국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올림픽을 앞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진압한다.”

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전달하게 됩니다.



6. 노태우의 6.29 선언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 수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고,

전두환은 김영삼, 이만섭 등의 주요 정치인과 만나 담판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6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이 이뤄지며

야당이 그간 주장해왔던 대통령 직선제를 여당이 수용하는 상황이 열리게 되며

차후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 헌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19871027일에 있었던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죠.

 

7. 6공화국 시대가 열리다.

하지만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었습니다.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의 열기는 현실 정치로 연결되었으나,

대승적 판단을 했다는 이유로 노태우 후보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상승하게 된 것이죠.

여기에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고

단독 출마를 확정짓게 됨에 따라

신군부의 권력 계승이 시민들의 손으로 이뤄지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당시 대선 득표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노태우(민주정의당)

8,282,738(36.6%)

김영삼(통일민주당)

6,337,581(28.0%)

김대중(평화민주당)

6,113,375(27.0%)

김종필(신민주공화당)

1,823,067(8.1%)




어떠셨나요? 대한민국 현대사를 논하는 과정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6월 민주항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들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오늘날 민주인권기념관’(dhrm.or.kr)으로 탈바꿈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다가오는 주말, 역사와 함께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시려면

민주화의 흔적을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글은 이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